세계적인 럭셔리 호텔 체인 아만(Aman)은 1988년 아드리안 제차(Adrian Zecha)가 태국 푸켓에 단 40개의 객실을 갖춘 아만푸리(Amanpuri)로 시작했다. 한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부터 애플의 팀 쿡에 이르기까지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셀러브리티들의 은신처로 알려지면서 ‘조용한 럭셔리’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4년 블라디슬라브 도로닌(Vladislav Doronin)이 아만을 인수한 이후, 브랜드의 정체성과 확장 전략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히치하이커는 국내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은, 아만의 오너십 변경이 브랜드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만에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특히 본 칼럼 마지막 부분을 참고하길 바란다.
아만의 창업 철학, 비즈니스보다는 예술
아만의 초기 철학은 명확했다. 독특한 위치, 소규모, 현지 재료를 활용한 정통적이고 미니멀한 디자인, 최고의 스파, 탁월한 서비스(직원 대 투숙객 비율 7:1), 이름으로 손님을 부르는 친밀함, 공식적인 체크인 절차나 영수증 서명 없이 ‘집에 있는 듯한 느낌’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기존의 호텔 서비스에서 탈피한 차별화된 전략은 아만을 단순한 호텔 이상의 경험으로 승화시켰고, 전 세계에 ‘아만 정키’라는 아만 마니아를 모으는 주된 원동력이었다.
동시에 이러한 독창성은 창립자인 아드리안 제차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기에 브랜드의 고유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만을 창조한 제차의 엄청난 예술성이 비즈니스 감각까지 담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창업 초기인 92년부터 자금 조달을 위해 지분을 줄이면서 그의 경영권은 금융회사로 서서히 넘어갔기 때문이다. 제차가 경영권을 잃게 된 과정, 그리고 다시 새로운 호텔 브랜드를 창조한 최근 소식은 이번 주 히치하이커TV에 자세히 소개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2014년 아만을 인수한 부동산 회사의 CEO인 도로닌이 스스로 아만의 대표로 올라섰을 때, 아만의 정체성 변화에 대한 우려섞인 여론이 컸다고 한다. 이를 의식했는지 그는 2015년 월페이퍼(Wallpaper)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모두가 내가 브랜드를 대규모로 확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나는 독특한 브랜드를 샀지, 금융 상품을 산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확장에 매우 신중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월페이퍼의 아카이브에서 찾을 수가 없고, 비교적 최근에 도로닌과 인터뷰한 기사의 인용구로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도로닌은 모스크바 근교에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자신의 집을 이른바 ‘러시아 스케일’이라고 표현하며 “나는 (규모가) 작은 일은 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인 대목에서 사람들은 그의 비전이 이전 오너인 제차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역시나 인수 이후의 아만은 도쿄와 도미니카 공화국에 호텔과 브랜드 아파트를 개장하면서 전에 없던 확장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최근 아만의 글로벌 앰버서더로 선정된 테니스 선수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 마리아 샤라포바(러시아). (출처: Haute Living, stylespeak)
인수 후 아만의 비즈니스가 변화한 배경
도로닌은 소련 레닌그라드(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모스크바 기반의 부동산 기업 캐피탈 그룹의 설립자로, 1993년 설립 이후 현대 모스크바의 가장 중요한 건물들을 개발해 왔다.
그런데 러우 전쟁 이후 그는 출신국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1986년 소련 시민권을 포기하고 1990년 스웨덴 시민이 되었다. 러시아 여권을 가진 적이 없고 서방에서 살고 있다”며 2014년에 이 회사의 지분을 매각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스펀 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도로닌은 2022년 4월 14일까지 캐피탈 그룹 디벨롭먼트의 지분 3분의 1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이 지분은 그의 어머니(러시아 국적)에게 옮겨갔다고 한다.
히치하이커는 그 밖에도 수많은 이야기를 조사했지만, 더 자세히 풀지는 않으려고 한다. 아만이라는 브랜드 정체성이 오너의 변경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다루고 소비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튜브에서는 아만을 창조한 아드리안 제차의 배경을 좀더 자세히 살펴봤는데, 제차는 애초에 출판과 언론사 운영으로 얻은 지리와 인류학 지식을 기반으로 기존에 호텔산업이 눈돌리지 않던 ‘텅빈 부지’에서 자신의 비전을 찾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후 아만을 소유하게 된 도로닌은 스케일이 큰 수익형 부동산 개발로 자신의 업을 일궈온 사람이다. 호불호를 떠나서, 당연히 호텔 브랜드를 가지고 하려는 일의 방향성이 다를 수 밖에 없다.
2022년 뉴욕 맨해튼에 아만을 개장하면서, 변화된 브랜드가 추구하는 것은 좀더 선명해졌다. 1박에 최대 2만 달러에 달하는 스위트룸과 클럽 멤버십 20만 달러라는 가격표는 아만의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준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아만 에센셜(Aman Essentials)이라는 리테일 스토어의 등장으로, 아만 로고가 새겨진 모자와 향수, 가방 등 브랜드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만 에센셜의 CEO는 도로닌의 파트너인 크리스티나 로마노바(Kristina Romanova)다.
러시아 출신의 전직 모델인 그녀는 도로닌보다 31세 연하로 그들의 두 자녀의 어머니이며, 아만 에센셜의 50%를 소유하고 있다. 로마노바는 보그 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호텔의 명성을 넘어 독립적인 럭셔리 리테일 비즈니스가 되는 것이 우리의 야망”이라며, 경쟁사로 “에르메스의 클래식하고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을 언급했다. 물론 호텔이 자사 브랜드로 머천다이즈 사업을 하는 건 타 호텔에서도 굉장히 흔하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케이스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머천다이스 사업이 추가되면서, 이전보다 상업적인 색채가 한층 짙어진 것은 사실이다.
아만은 설립 이후 세계 최고의 은둔형 럭셔리 호텔로서의 명성을 유지해왔지만, 도로닌의 인수 이후 상업적이고 확장적인 방향으로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다. 아만 에센셜과 도심형 호텔의 확장은 아만이 더 이상 아드리안 제카가 꿈꿨던 작고 독특한 럭셔리 호텔 체인이 아닌, 글로벌 럭셔리 호텔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치며 – 아만이 마주한 아이러니
최근 2~3년 사이에 아만은 한국에서도 여러 유명 셀럽들이 여행 경험을 소개하면서 크게 알려지고 있지만, 아만의 전후 변화에 대해서는 미디어가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또한 아만은 한국에 호텔을 전개할 계획이 있다고 밝혀진 바 있는데, 서울에 아만이 들어온다면 역시나 도심형 아만 호텔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는 리조트 검토 중)
창업 당시의 유니크한 경험을 기대하고 아만에서의 여행을 계획하는 소비자가 있다면, 첫 호텔인 푸켓의 아만푸리를 포함해서 가급적 2010년대 이전에 영업을 시작한 리조트형 아만을 추천하고 싶다. 물론 직접 취재를 가보지 못해 서비스 퀄리티가 유지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제차가 창조한 ‘조용한 럭셔리’를 경험할 수 있는 입지 조건과 건축 설계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제니가 극찬했던 아만기리, 혜리의 아만풀로는 모두 2010년 이전에 영업을 시작한 초창기 아만에 속한다. 아이유로 유명해진 나고야의 아만네무, 최근 큰손 노희영 채널에 직접 소개된 상하이 아만양윤이 비교적 최근인 2016년과 17년 오픈한 리조트형 아만이다. (* 노희영 씨도 최근의 아만은 초창기 아만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말을 영상에서 직접 언급했다)
특히 초창기 아만이 가진 프리미엄적 요소는 바로 ‘부지 선정’에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만이 다른 호텔과 달랐던 이유는 바로 ‘의도적인 고립’을 누리게 하려던 제차의 비전에 있었다. 그런데 이 비전이 자본주의와 만나면 ‘해서는 안되는 사업’이 되어버린다. 가급적 방을 적게 지어야 하고, 엑세스도 어렵고, 홍보도 많이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논리 하에서 호텔은 무조건 유동인구가 많은 ‘도심’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도심에는 이미 아름답고 비싼 럭셔리 호텔이 많고, 굳이 왜 아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점에서 의문점이 생긴다. 지금의 아만이 마주한 아이러니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