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워케이션 케이스를 조사하다 보면 갑갑한 측면이 있습니다. 월간 디자인 2022년 8월호에 ‘당신이 지금 워케이션을 떠날 수 없는 이유‘를 기고할 때도 강조했지만, 한국에서 워케이션을 둘러싼 논의는 정부(지자체), 기업, 개인의 입장에 따라 첨예하게 갈라지며 저마다 해석도 다릅니다. 국내 다수 기업은 원격근무에 소극적인 만큼이나 워케이션을 일시적인 기업 홍보나 부수적인 직원 복지로 해석하고 있으며, 근본적인 업무 환경의 자유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개인 프리랜서들은 활발하게 워케이션을 다니며 트렌드를 이끌고 있지만 이를 여행과 구별되는 데이터로 잡기 어렵고, 따라서 지자체들은 기업만 바라보며 정책을 내놓고 있으니 동상이몽의 시간은 좀더 길어질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점점 높아지고 있는 ‘근무 환경 선택의 자유도’는, 기업들이 우수 인재를 붙잡기 위해 자연스럽게 워케이션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조금 더 급진적인 기술 기반 기업들은, 아예 워케이션을 회사의 정체성으로 내세우며 전 세계 인재를 끌어들이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에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발견한, 폴란드 서부의 조용한 도시 포즈난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IT 회사 앱유나이트(appunite)도 그 중 하나입니다. 2022년에는 무려 6개국을 돌면서 일과 여행을 함께 하는 회사라니, 간단히 케이스 스터디를 해보죠.
이들은 왜 워케이션을 택했나?
2010년 창업한 앱유나이트는 소프트웨어 개발사입니다. 기업으로부터 수주를 받아 원하는 모바일 앱을 구축해주는 회사에요. 특별히 혁신적인 원천 기술을 보유했다거나 세계 시장에 알려진 유명 기업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사고, 홈페이지 상 기재된 직원 수로 보면 약 100여 명 규모의 중소기업으로 보입니다.
이 기업이 워케이션을 시작한 건 무려 2018년입니다. 이미 당시에도 원격근무에 필요한 기술적 제반 환경은 충분히 갖춰진 시기였죠. 그런데 이들은 원격근무를 집이나 카페에서 하는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팀원들이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새로운 여행지에 가서 일을 해볼 수는 없을까? 언뜻 불가능해 보였던 이 아이디어가 사내에서 나온지 단 5개월 만에, 이들은 태국 치앙마이에 임시 사무실을 열며 첫번째 큰 도전을 하게 됩니다.
이들이 태국을 선택했던 이유는 두 가지인데요. 첫째, 일하는 장소 주변의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되도록 이국적인 나라를 선택할 것, 두번째 요소는 인터넷 액세스입니다. 태국 치앙마이는 전 세계 디지털 노마드가 찾는, 원격 근무의 성지이기 때문에 이들의 니즈에 부합하는 여행지였습니다.
이어서 2019년 이들이 선택한 두번째 워케이션 장소는 포르투갈입니다. 가장 먼저 수행한 일은 사무실을 얻는 대신에 리스본 교외에 위치한, 침실 5개와 수영장이 있는 집을 통째로 임대한 것인데요, 집 근처에 걸어서 15분만에 바다를 볼 수 있는 집이라고 합니다.(일상 탈출, 해방감을 얻기에 용이한 위치) 그리고 재정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워케이션 참여자들의 지출을 지원할 수 있는 예산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사항이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 워케이션 직후 코로나19 유행으로 약 3년간 워케이션은 멈추게 됩니다.
6개국으로 떠나는 워케이션?
2022년, 이들은 새로운 워케이션 이니셔티브를 시작하게 됩니다. 몬테네그로, 테네리페, 이스탄불, 자코파네(폴란드), 오스트리아, 멕시코 등 총 6개 지역으로 자유롭게 선택 및 이동하는 워케이션을 전사적으로 시행하게 된 것인데요. 워케이션을 바라보는 이 회사의 남다른 관점은 이들의 소셜미디어(인스타그램)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자신들의 경로와 워케이션 과정, 서로 다른 시차 극복의 노하우, 직원들의 소감에 대해 수시로 포스팅하며 워케이션의 효용성을 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워케이션은 이 정도 되면 더 이상 직원 복지가 아니라 이 기업의 정체성으로 봐야 합니다.
이들은 워케이션을 조직의 정체성으로 만들기 위해 몇 가지 규칙을 정합니다.
1. 그룹(팀)이 가고 싶은 곳을 함께 결정한다,
2. 한 장소에 최대 한 달 동안 머물 수 있다,
3. 본인 외에도 파트너 및 아이들을 데려 갈 수 있다,
4. 퇴근 후 그 장소를 즐기고 많은 활동을 할 것을 권장한다,
5. 회사는 직원의 숙박 비용과 항공권 가격의 전체 또는 일부를 지원한다.
6. 6개국 중 아무 장소나 직원이 선택할 수 있으며, 한 나라가 아닌 여러 나라도 선택 가능하다
직원들의 반응은 당연히 긍정적입니다. 또한 서로 다른 나라에 거주하며 흔히 겪을 수 있는 시차 맞추기와 클라이언트 요구에 즉각 대응하는 문제도 서서히 새로운 업무 환경에 맞추어 해결해 나아가고 있네요. 최근 출장이나 거주 환경의 이동이 개인의 사회적 연결망과 창의성 향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내부 에너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외부 자극이 필수적이라는, 출장이 가져오는 이점을 분석한 아래 칼럼도 참고해볼 만 합니다.
마치며
지난 주 김다영의 똑똑한 여행 트렌드에서, 에어비앤비 체험 호스트를 시작한 초보 호스트님과 인터뷰가 끝나고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최근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체류 기간이 결코 짧지 않다는 후문을 들었습니다.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일과 여행을 함께 하려는 워케이션 여행자들이었던 겁니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를 제쳐두고 한국을 선택한 외국인들에겐,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사랑이 큰 이유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한국의 와이파이 인프라와 도심 속 하이킹이 가능한 서울의 자연환경, 강원도나 제주 등 풍부한 지역 관광지도 한몫 하겠지요.
퇴사가 아니면 체류여행은 그저 먼 꿈일 뿐인 우리에게도, 전 세계를 일터이자 여행지로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그 날이 아마도 기업이 워케이션의 원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날이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