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히치하이커 대표 김다영입니다. ‘칼럼’은 조금 더 편하게 개인 의견을 정리하고 뉴스 아티클과 차별화하기 위해 존대체를 생략합니다.
간만에 각잡고 생각을 정리해볼 ‘떡밥(?)’을 발견했다. 2023년 6월 24일 ‘더 뉴요커’에 철학자인 아그네스 칼라드가 기고한 ‘여행에 반대하는 건에 대하여(The Case Against Travel)’가 무려 1달 넘게 미국 소셜미디어에서 논쟁이 되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역시나 국내에는 검색해 보니 언급도, 이슈도 전혀 없다)
이게 얼마나 큰 이슈냐면, 7월 29일 뉴욕 타임즈가 위 칼럼을 저격한 ‘여행을 위한 건에 대하여(The Case for Tourism)’라는 반박 칼럼을 냈을 정도다. 페이월 때문에 뉴욕 타임즈의 반박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레딧이나 유튜브 및 여행 블로그에는 대체로 원문 칼럼에 대한 반대 의견이 우세하다.
먼저 뉴요커의 여행 반대 칼럼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우리 시대에 여행은 너무 과도하게 의미가 부여되어 있지만(특히 연결성), 실제로는 진정한 경험과 연결을 오히려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 여행자는 여행을 통해 변화하기를 원하지만 대개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며, 오히려 관광지와 현지인에게 (주로 해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 현대사회의 여행은 피상적인 소비가 주 목적이기 때문에, 현지인을 바라볼 때도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그들을 바라본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연결’될 수 없다.
– 단순한 호기심이나 ‘무언가를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여행을 과잉 이용하는 것은, 나와 내 주변의 삶을 직시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반박 의견은 대부분 ‘저자가 여행에 대한 효용성을 과소평가한다’, ‘제대로 된 여행을 못 해본, 방구석 엘리트주의자의 여행 폄훼일 뿐이다’ 등이다. 처음에는 나도 원문을 읽으면서 갸우뚱하는 구절이 많았는데, 어색한 구글 번역 말고 딥엘 번역으로 찬찬히 읽어보니 기고자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솔직히 나는 원문에 공감되는 부분이 더 많다. 처음 뉴요커의 원문에서 공감되는 대목과 의견을 정리해 본다.
1.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러 가지만, 결국 여행지에 변화를 강요한다.
“관광객은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집을 떠나 다른 곳을 방문하는 일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입니다.” 이 정의는 관광 인류학의 고전 학술서 “호스트와 게스트”의 서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관광 여행은 정확히 무엇을 변화시킬까요? 서문 마지막에 답이 나옵니다. “호스트가 관광객에게 빌려주는 것이 그 반대보다 더 많기 때문에, 관광은 호스트 커뮤니티에 연쇄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즉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러 가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변화를 강요하게 됩니다.
여행자가 여행지를 변화시키는 현상이 왜 나쁜 것일까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중략) 소중히 여기지도 않는 것을 그저 보러만 가는 거라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의 여행에는 ‘현지성’이 대단히 강력한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구글 지도와 우버가 원하는 곳을 빠르게 데려다주는 지금의 자유여행에서, 누구도 ‘관광객’으로 남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현지인이 먹는 음식을 먹고, 현지인이 가는 힙 플레이스를 가고, 현지인처럼 거리를 걷는 장면을 피드에 남기는 여행 말이다. 그런데 더 많은 여행자가 현지성을 추구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현지성은 서서히 파괴되고 관광지로 대상화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찾은 여행지에서, 여행자는 굳이 그 곳을 소중하게 여길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여행자가 추구하는 현지성은 어디까지나 내가 원하는 것을 즉각 얻을 때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엇이 소외되느냐, 바로 ‘연결’이다.
2. 여행자는 자신의 경험을 ‘외주화’ 함으로써,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관광객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증명을 민족학자, 엽서, 해야 할 일이나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통념에 맡깁니다. 이러한 존중, 즉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 바로 관광객의 경험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중략)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파리를 돌아다니는 동안 저는 사람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들의 옷차림과 태도, 상호작용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주변 프랑스 사람들에게서 프랑스다움을 보려고 노력한거죠.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친구를 사귀는 방법이 아닙니다.”
팬데믹 이전의 내 여행에서 많이 생각했던 지점이다. 구글 지도에 빼곡히 들어찬 별표는, 여행지에서 반드시 다녀와야 할 일종의 수행 목록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여행은 일종의 to-do list, 도장깨기, 미션 수행이다 보니 어느 시점이 되면 즐겁지가 않았다. 별표는 물론 스스로 즐겨찾기한 능동적 정보였지만, 그 정보 역시 ‘누군가가 여기 맛있다더라, 볼만하더라’라는 다른 이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여행의 테마를 분명하게 한 후 그에 대한 장소를 설계한 게 아니라, 통념적인 정보를 내 여행에 단순히 대입시켜 다닌 것 뿐이다. 이런 여행은 보통 ‘실패를 줄이는 여행’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실패한 여행에 가깝다.
이렇게 루트화된 여행에서, 여행자는 점점 더 현지인과 연결되기 어려워진다. 지금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일본 여행기를 보면, 공통적으로 맛집과 쇼핑, 덕질 등 기능적인 목적이 중심에 있다. 애초에 자신이 속해있는 세계를 넓히기 위한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현지인과 소통할 이유가 없다. 이런 류의 여행은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통장의 잔고는 변하겠지만 자신이 처한 현실이나 세계관은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이 뉴요커 칼럼에도 ‘(지금의) 여행은 부메랑이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그 부분이 특히 와닿는다.
또 아이러니한 지점은, 지금 커다란 인기를 얻는 여행 유튜버들은 ‘현지인과의 거침없는 소통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메인 콘텐츠로 삼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콘텐츠를 선호하고 대리만족을 하면서도 그런 여행을 본인이 하지는 않는다는 건, 뭘 의미할까? 정작 우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연결과 소통’을 전혀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여행하고 있다는 반증 아닐까?
3. 현대사회에서 여행자는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으로 브랜드화되지만, 정말 그럴 가치가 있을까?
“여행은 흥미로운 장소를 보고, 흥미로운 경험을 하고, 흥미로운 사람이 되는 등 성취감으로 브랜드화됩니다. 정말 그럴 가치가 있을까요?”
“(여행은) 무언가를 경험하고, 연결하고, 변화하고, 흥미롭고 교훈적인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내러티브로 위장하게 해줍니다. 언젠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거든요.”
마치 ‘너희들의 여행 경험에는 성취라 부를 만한 가치가 없다’는 듯한 뉘앙스 때문에, 많은 이들이 발끈한 포인트가 된 것 같다. 가뜩이나 금전적 자산이 부족한 젊은 세대에게 ‘경험’은 중요한 디지털 자산이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경험이 ‘성취’일까? 여행이 여전히 퍼스널 브랜딩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
1세대 여행 블로거가 출현한지 15년 가까이 됐는데, 지금까지도 여행 블로거와 인플루언서는 사회적, 직업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나 역시 ‘여행하며 돈버는 삶’을 살았던 시간이 길었지만, 그런 삶은 경제적 보상과 관계없이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이유가 뭐였을까? 우리 사회의 공공 이익에 기여하는 바가 크지 못했기 때문이다. 희소한 기회를 독점할 때보다, 더 많은 이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직업적 포지션을 가졌을 때 비로소 ‘성취’의 의미를 알게 됐다.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아직도 해외 여행을 재개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여행 분야에는 이제 자기 경험을 사진과 글로 알리는 수준의 인플루언서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 이 칼럼에도 나와있듯, 여행 콘텐츠는 소비자보다는 생산자의 필요에 의해 주도되는 커뮤니케이션 형태일 뿐이다. 여행은 너무 쉬워졌고, 남들의 여행 경험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시대다.
마치며
이 칼럼 논쟁을 접하면서, 최근 내가 갖고 있는 여러 고민을 되짚어보게 된다.
최대한 많은 곳을 직접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파괴적인 마케팅과 결합되어 터무니없는 과잉 여행을 촉발하는 게 지금의 한국이다. 적어도 이런 산업의 방향성에는 일조하고 싶지 않다. 운영 중인 유튜브 채널에서, 산업 내부에서 쉬쉬하는 (크루즈) 개별 단가를 공개한 이유는 ‘상품화된 여행’에 우리의 자원을 쉽게 외주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의도와 다르게 마치 특정 여행을 권장하는 역할로 기능하고 있고,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다.
그리고 칼럼을 읽으며, 나는 여행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여행은 내게 언제나 ‘학습’이었고, ‘학교’로 기능했다. 언제나 궁금한 분야를 더 많이 알아보기 위해 떠났다. 팬데믹 3년 이후 아직 어떤 곳도 목적지로 선택하기 어려운 이유는 칼럼에도 나와있듯, 굳이 가지 않아도 학습할 수 있는 방법이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나는 지금 어떤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고, 어떤 여행이 그런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이 자문에 선명하게 답할 수 있을 때, 항공권을 예매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