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까지 50만 명에 불과했던 미국의 크루즈 이용객 수는, 1990년대 말 500만 명을 돌파하며 10배 이상 증가했다. 그런데 엄청난 크루즈 산업 성장세에 TV 드라마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77년부터 1986년까지 방영된 미국의 TV 드라마 ‘더 러브 보트 (The Love Boat, 한국 방영 제목 ‘사랑의 유람선’)’는 대중에게 크루즈 여행을 친숙하게 소개하며, 미국 크루즈 산업 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히치하이커닷컴은 TV드라마가 어떻게 크루즈 여행을 대중화시키고, 크루즈 산업의 판도를 바꿨는지를 살펴본다.

1. 대중적 인식의 변화
이 드라마는 실제로 전직 크루즈 디렉터로 일했던 제럴딘 손더스가 쓴 논픽션 책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주요 캐릭터인 선장 메릴 스터빙(개빈 맥레오드 분)과 그의 선상 승무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각 에피소드마다 매번 다른 게스트 배우들이 출연해 승객 역할을 맡았다. 당시 게스트 배우로는 한국계 미국인인 쟈니 윤, 톰 행크스 등이 등장하기도 했다. 드라마 속에서 승객들은 로맨스를 찾거나 새로운 인연을 맺고, 선상에서 즐거운 경험을 하며 문제를 해결한다.
이 드라마가 시작하던 1970년대의 크루즈 여행은 주로 신혼부부나 노년층이 즐기는 특수한 여행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977년 ‘더 러브 보트’가 방영되면서 다양한 연령대와 인종이 크루즈를 즐기는 모습이 매주 수천만 명의 시청자에게 노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는 크루즈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여행’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고, 특히 젊은 층과 가족 단위 여행객들의 관심을 끌었다. 1980년대에는 무려 5천만 명이 이 드라마를 시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도 방영되며 인기를 끌었다.
2. 실제 크루즈 기업과의 협업, 선박 건조 붐 일으켜
‘더 러브 보트’는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크루즈 산업의 가장 성공적인 마케팅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드라마는 실제 크루즈 회사인 프린세스 크루즈(Princess Cruises)와 협업하여 제작되었으며, 촬영도 주로 퍼시픽 프린세스(Pacific Princess)와 아일랜드 프린세스(Island Princess)에서 진행되었다.
프린세스 크루즈는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예약이 급증했고, 다른 크루즈 회사들도 이를 본받아 신형 크루즈선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40척 이상의 새로운 크루즈선이 건조되었으며, 이는 크루즈 역사상 첫 번째 선박 건조 붐을 일으켰다. 1998년에는 로얄 캐리비안(Royal Caribbean)이 2,8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최초의 메가 크루즈선 MS Sovereign of the Seas를 선보였으며, 디즈니 크루즈 라인도 같은 해에 출범했다. 이처럼 점점 더 많은 크루즈 운항사가 생겨나 서로 경쟁하게 되면서 크루즈 여행은 더 저렴해졌고, 시장이 더욱 확대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3. 엔터테인먼트와 이벤트가 전면에 등장
‘더 러브 보트’는 크루즈에서 엔터테인먼트의 중요성을 강조한 프로그램이었다. 드라마에서는 다양한 뮤지컬 공연이 등장했으며, 매회 여러 유명 배우와 가수들이 게스트로 출연해 화려한 쇼를 선보였다. 85년도 방영분(위 영상)에는 당시 인기 그룹이었던 템테이션즈가 출연해 공연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를 계기로 크루즈 회사들은 대형 공연장을 갖춘 크루즈선을 설계하기 시작했고, 현재 대부분의 크루즈선은 브로드웨이 스타일의 공연, 고급 쇼룸, 최신 음향 및 조명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또한, ‘더 러브 보트’에서 자주 등장했던 2층 구조의 로비와 웅장한 계단은 이후 현대 크루즈선의 표준적인 아트리움(Atrium) 디자인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드라마 속 설정이 실제 크루즈 디자인과 서비스에 영향을 미친 사례는 많은데, 대표적인 서비스 요소가 크루즈의 ‘로맨틱한 이벤트’다. 드라마 속에서 승객들은 새로운 사랑을 찾거나 특별한 순간을 기념했으며, 이는 크루즈를 신혼여행이나 기념일 여행의 대표적인 선택지로 만들었다. 프린세스 크루즈는 이를 적극 활용하여 선상 저녁 식사, 객실 내 로맨틱 데코, 발코니 룸에서의 프라이빗 다이닝 등 다양한 로맨틱 패키지를 출시하게 된다.
마치며
현재 크루즈 산업은 더욱 발전하여 세계적으로 2,000개 이상의 크루즈 항구가 운영 중이며, 초대형 크루즈선이 등장하면서 더욱 많은 승객을 유치하고 있다. 그런 지금도 프린세스 크루즈는 ‘사랑의 유람선’을 기념하는 특별 크루즈를 진행하며 독보적인 영향력과 레거시를 꾸준히 과시하고 있다. TV 한 편이 하나의 산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러브 보트의 사례는 ‘스크린 투어리즘’이 여행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꼽힐 만 하다.
한국에서도 MBC에서 1984년 비교적 발빠르게 원작을 방영했고, 심지어 2000년에는 한국판 ‘사랑의 유람선’까지 드라마화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25년이 흐른 지금의 한국에서 크루즈 여행은 여전히 난이도 높은 여행이자 막대한 마진을 낀 비싼 여행일 뿐이다. 우리는 세계 10위 권의 경제대국이자 여행 소비 지출국(outbound)이 되었지만, 우리의 눈높이에 맞는 크루즈와 프리미엄 여행의 공급은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건 왜일까? 이미 50년 전부터 이러한 드라마를 향유하고 크루즈 여가산업의 확대로 연결시킨 미국 관광산업의 저력을, 크루즈 히스토리를 살펴보며 새삼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