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히치하이커닷컴은 2024년 주요 여행기업의 트렌드 리포트를 분석해, 그 중 5가지 트렌드를 선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위 글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익스피디아의 흥미로운 트렌드 중에 ‘저렴이(dupe) 여행지의 부상’이라는 트렌드가 있습니다. 이 트렌드에 한국의 서울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저렴이 여행지란?
dupe을 제가 ‘저렴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래의 뜻은 속임수입니다. 이 단어가 ‘저렴이’로 널리 사용된 대표적인 분야가 뷰티업계인데요. 예를 들어 바비 브라운이나 에스티 로더와 같은 럭셔리 브랜드의 파운데이션과 성능이 유사한 저가 브랜드 상품을 찾아내서, ‘원 상품의 dupe’ 버전으로 명명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국내 뷰티업계에서도 이같은 저렴이 트렌드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맥(MAC)의 특정 섀도우와 발색이 비슷한 섀도우가 에뛰드하우스에 있다, 이런 겁니다. 실제로 뷰티 브랜드에서 저렴이 공식을 바이럴 마케팅에 역이용한 사례도 있고요. 그런데 ‘저렴이’ 개념을 여행업계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익스피디아가 2024년의 여행 트렌드로 ‘저렴이’를 지목한 배경에는, 2023년을 잠식한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지출을 줄였고, 이는 여행산업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비싼 물가가 없으면서도 멋진 사진을 찍고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이른바 ‘가성비 여행지’ 트렌드가 떠오른 것입니다. 내년에는 이 트렌드가 좀더 심화될 것이라고 진단한 거죠.
심지어 익스피디아는 구체적으로 10개의 여행지를 뽑아서 이를 대체할 저렴이 여행지를 지목했습니다. 이 여행지 대체 목록은 지금 CNN, ELLE, 허핑턴포스트를 필두로 전 세계 주요 여행 매체와 언론이 빠르게 기사화하고 있으며, 블로그 같은 매체들도 여행 핵(hack), 즉 꿀팁이라며 발빠르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 타이페이 (서울의 저렴 버전 여행지)
- 파타야 (방콕의 저렴 버전 여행지)
- 파로스(산토리니의 저렴 버전 여행지)
- 퀴라소 왕국 (세인트 마틴의 저렴 버전 여행지)
- 퍼스(시드니의 저렴 버전 여행지)
- 리버풀 (런던의 저렴 버전 여행지)
- 팔레르모 (리스본의 저렴 버전 여행지)
- 퀘벡 시티(제네바의 저렴 버전 여행지)
- 삿포로 (체르마트의 저렴 버전 여행지)
- 멤피스(내슈빌의 저렴 버전 여행지)
반드시 짚어봐야 할 문제점 & 마치며
위 리스트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세계 언론에 퍼지는 것을 보면서, 저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짚어봐야 할 문제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심각한 문제점은 서울의 대체 여행지가 국내에서 지목되지 못했다는 점이겠죠. 그리스, 태국, 호주는 자국 내에서 대체 여행지가 선정됐습니다. 즉 이 트렌드에 따라 여행지를 선택하더라도 관광 수입의 유출이 없다는 것이죠. 심지어 일본 삿포로는 스위스 체르마트의 대체재로 언급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그런데 서울은 우리나라의 지방 거점 주요 도시가 아닌, 대만의 타이베이가 대체하네요. 그럼 서울로 오려고 했지만 예산이 부족한 여행자는 타이베이를 선택할 수 있고, 관광 수입은 대만으로 옮겨가는 거죠.
두번째 문제점은 관광지로서의 한국이 가격경쟁력 면에서 너무나도 불리해졌다는 것이 대내외적으로 박제된 것입니다. 내년의 데스티네이션 트렌드가 가성비인데, 우리는 ‘비싼 여행지’라는 낙인을 받고 시작하는 거니까요. 실제로도 이 높은 물가는 내수 여행 수요에도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미 럭셔리 업계에서는 곡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고, 팬데믹 때 국내 호텔로 향하던 호캉스 수요는 이미 ‘가성비’를 따라 해외로 쏠리고 있습니다. 우리 내부의 여행 경쟁력이 이 가성비를 맞춰주지 못한다면, 2024년에는 훨씬 더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세번째 문제점은, 프리미엄 관광에 대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짜피 고물가를 업계에서 핸들링할 수 없다면, 고물가임에도 불구하고 꼭 와야 할 동기를 줘야 하는거죠. 우리와 비슷하거나 더 비싼 물가를 가진 유럽의 주요 관광 도시들은 이미 숙박 시설부터 아웃도어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프리미엄 여행상품들을 보유하고 있고, 관련 여행사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프리미엄 상품을 오히려 외국 여행사가 만들어 파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히 내용은 부실할 수밖에 없고요.
이미 수많은 매체에 한국이 고렴이(?) 여행지로 지목된 만큼, 2024년에는 그만한 가치를 줄 수 있는 여행지로 발돋움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저도 내년에는 프리미엄 여행상품 기획에 대한 교육을 대폭 보강할 예정입니다. 이래저래 걱정이 많아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