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나라 일본이 대형 크루즈 기항지 투어의 고부가가치화에 빠르게 속도를 내고 있는 반면, 한국은 크루즈 기항지 관광 프로그램의 심각한 부재로 인해 승객은 물론 승무원들의 소비 수요조차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됩니다.
히치하이커는 일본 국토교통성이 최근 발표한 조사 결과와 주요 하이엔드 크루즈가 운영 중인 일본 기항지 프로그램을 분석해 보고, 국내 크루즈 산업의 기항지 투어 부재 실태와 개선 방향을 짚어봅니다.
1. 일본 국토교통성 조사: 럭셔리 승객일수록 기항지 투어 지출 극대화
크루즈 여행에서 승객들이 항구에 내려 즐기는 기항지 옵션 투어(Shore Excursion)는 단순히 지역을 구경하는 일정을 넘어, 기항지 지역 경제로 직접적인 관광 소비가 흘러들어가게 만드는 핵심 고리입니다.
최근 일본 국토교통성이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럭셔리 크루즈 승객일수록 기항지 투어 참여율과 지출액이 현저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크루즈 선박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고품질의 기항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기항지 경제 파급효과를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관련 뉴스
일본 국토교통성 항만국이 2025년 8월부터 12월까지 기항한 18척의 크루즈선 승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럭셔리·엑스페디션(LE) 클래스 크루즈 승객의 기항지 투어 참여율은 60%에 달했습니다. 이는 캐주얼·프리미엄(CP) 클래스 승객의 참여율(20%)을 3배나 앞지르는 수치입니다.
투어 가격대에서도 명확한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LE 클래스의 외국인 승객들은 1인당 2만~3만 엔대는 물론, 5만~6만 엔(한화 약 45만~55만 원) 상당의 고액 투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또한 발착지에서의 1인당 평균 소비액은 외국인 LE 클래스 승객 기준 14만 2,000엔(한화 약 130만 원)에 달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기항지 체류 시간이 1시간 늘어날 때마다 승객 1인당 소비액이 약 900엔 증가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2030년까지 기항지 1인당 평균 소비액을 2025년 대비 1.5배인 3만 3,000엔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체류 시간 연장과 고품질 기항지 투어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2. 럭셔리 및 프리미엄 선사(LE/CP급)의 일본 기항지 투어 사례
프랑스의 하이엔드 탐험 선사 포낭(PONANT)은 미국 스미소니언 연구소와 협력해 학술적 깊이를 더한 ‘스미소니언 저니스’ 기항지 투어를 선보입니다. 일본 9일 크루즈 상품의 경우 스미소니언 저니스 소속의 아시아 역사·문화 학자 및 전문가 2인이 전 항해 기간 동안 탑승합니다. 항해 중 선내 라운지에서 기항지와 관련된 역사·문화 강연을 진행하고, 기항지 투어 시 승객들과 동행하여 학술적 해설을 제공합니다.
스미소니언 상품의 경우 일본 9일 여정 중에 한국은 부산으로 단 하루밖에 들르지 않네요. (*찾아보니 거의 대부분의 럭셔리 크루즈 동북아 루트가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운영되며 한국은 대체로 1일 여정만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리미엄급 크루즈에서는 한국 단독 여정은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초호화 럭셔리 선사 실버씨(Silversea)는 기항지의 식문화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독점 미식 프로그램 ‘S.A.L.T.(Sea and Land Taste)’를 운영합니다. 가나자와 등 주요 일본 기항지에서 제공되는 이 투어는 지역 미슐랭 셰프와의 프라이빗 식사, 역사 깊은 사케 양조장 단독 방문, 전통 가이세키 마스터 클래스 등 일반 관광객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특권적 기회를 제공합니다. 승객들은 현지 마켓에서 셰프와 함께 직접 식재료를 수급한 뒤 선상으로 돌아와 요리해 보는 연계형 럭셔리 미식 경험을 누리게 됩니다. 🚢
올 인클루시브 럭셔리 선사인 리전트 세븐시즈(Regent Seven Seas)는 모든 일반 기항지 투어를 무료로 제공함과 동시에, 한 단계 높은 프리미엄 옵션인 ‘리전트 초이스(Regent Choice)’ 투어를 운영합니다. 교토(고베)나 히로시마 기항 시 제공되는 이 초고가 프로그램은 소규모 전용 차량을 이용해 일반 단체 관광객의 출입이 제한된 국보급 사찰의 프라이빗 개방, 전통 다도 원로의 개인 정원 방문 등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합니다. 단순한 명소 방문을 넘어 일본 전통문화의 최고 수준을 독점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획된 것이 특징입니다. 🚢 리젠트세븐시즈의 일본 크루즈 모두 보기(2027~)
이처럼 글로벌 LE급 선사들은 일본의 기항지 관광을 단순히 ‘이동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지역 식문화(S.A.L.T.)’, ‘학술·자연유산 탐험(Ponant x Smithsonian)’, ‘차별화된 프라이빗 투어(리젠트 초이스)’ 등 명확한 콘셉트로 패키징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에 대응할 수 있는 일본의 각 지자체의 풍부한 인바운드 투어 자원이 이미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각기 다른 목적의 기항지 프로그램에 다양하게 연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기항지 역시 대형 버스로 전통 시장이나 면세점을 다녀오는 형태에서 벗어나, 지역의 특색 있는 자원(예: 제주 제주해녀 문화 프라이빗 체험, 부산 전통주·미식 큐레이션 등)을 고부가가치 소규모(Small Group) 기항지 투어로 연계시키는 벤치마킹이 시급합니다.
3. 한국의 현주소: 준비 안 된 기항지, 승무원조차 배에 갇히는 실정
이처럼 글로벌 및 일본 크루즈 시장이 ‘고부가가치 기항지 투어’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기항지 투어 실태는 매우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한국을 찾는 크루즈 기항지 프로그램은 단순 면세점 셔틀이나 정형화된 대형 버스 관광에 편중되어 있어, 승객들의 자발적인 소비와 지역 밀착형 체험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항지 콘텐츠 부재의 단적인 예는 승객뿐만 아니라 ‘승무원 관광 프로그램의 부재’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2026년 2월 경인일보 보도에 따르면, 인천항 등에 입항하는 크루즈 승선 인원의 20~30%를 차지하는 승무원들을 위한 전용 관광 프로그램이나 이동 여건 조성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크루즈 승무원 인천관광 프로그램 필요”… 승선인원 20~30%, 소비 무시 못해
실제로 기항지에 내려도 마땅히 갈 곳이 없거나 전용 이동 수단이 없어, 승무원들이 기항지 관광을 포기하고 배 안에서 머무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관련 업계에서는 “승무원들은 기항지에서의 씀씀이가 크고 반복 방문 가능성이 높은 숨은 소비 주체임에도, 이들을 수용할 맞춤형 기항지 프로그램이나 이동 인프라(특화 버스, 전용 택시 등)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승객에게는 천편일률적인 면세 쇼핑만 제공하고, 승무원은 배 안에 방치하는 구조 속에서 한국의 기항지들은 크루즈 입항이라는 호재를 맞고도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치며
크루즈 선박이 항구에 들어오는 것 자체만으로는 지역 경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배에서 내린 승객과 승무원이 기항지에서 기꺼이 주머니를 열 수 있게 만드는 ‘특색 있고 세분화된 기항지 투어 프로그램’이 결합되어야 비로소 크루즈 산업이 완성됩니다. 이제 한국 크루즈 정책 역시 대형 선박 유치라는 외형적 성과에서 벗어나, 지역의 미식·문화·예술을 결합한 독점적 기항지 큐레이션과 이동 인프라 확충에 사활을 걸어야 할 시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