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현재, 동남아시아 하늘이 거대한 잿빛 장막에 덮였습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과 칼리만탄(보르네오) 일대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인해 유독성 연무(Haze)가 국경을 넘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역을 습격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싱가포르의 대기오염지수(PSI)가 위험 수준으로 치닫고, 말레이시아 수십 개 지역의 학교가 휴교하는 등 역외 대기 오염으로 인한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한국 여행자들에게는 2~3월 태국 북부의 화전 문제가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인도네시아의 산불 사태 역시 대규모 농업 자본과 불법 화전 개간이 얽힌 수십 년 역사의 지옥문이자 심각한 환경 파괴 현장입니다. 히치하이커는 동남아시아의 만성적인 환경 공해와 연무 악재가 장기적으로 한국인 여행 수요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짚어 봤습니다.
수십 년간 반복된 비극, 인도네시아의 기업형 화전
인도네시아의 연무 사태는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된 농지 개간 관행에서 출발합니다. 팜유 농장(Oil Palm Plantation)과 제지용 목재림을 확보하려는 대형 농업 기업 및 현지 농민들이 가장 저렴하고 빠른 방법으로 밀림을 정리하기 위해 불을 지르는 ‘슬래시 앤 번(Slash and Burn)’ 화전을 감행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발화 지점의 대다수가 ‘이탄지(Peatland)’라는 점입니다. 이탄지는 나뭇잎과 줄기 등이 완전히 부식되지 않은 채 수천 년간 쌓여 형성된 탄소 저장소이자 습지입니다. 평소에는 물을 머금고 있지만, 개발을 위해 배수로를 뚫어 물을 빼내면 거대한 건조 탄소 덩어리로 변합니다. 여기에 불이 붙으면 지표면뿐만 아니라 지하 십수 미터 깊이까지 숯처럼 타들어 가기 때문에 겉으로는 불길이 잡힌 것처럼 보여도 땅속에서 수개월간 연기를 뿜어내며 지속됩니다.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 속에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2010년대 중반부터 이탄지 보호법을 신설하고 불법 화전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지자체와 대기업 간의 유착, 광활한 지역을 감시하기 힘든 행정력의 한계, 그리고 엘니뇨로 인한 기후변화가 맞물리면서 수십 년째 매년 건기마다 동일한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찾아보니 이미 2018년에 경향신문에서 이 연무로 인한 국제 분쟁을 심층 취재한 내용이 있더라고요. 꽤나 오래된 문제였던 겁니다.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2~3월 화전과 닮은꼴
이러한 동남아의 만성적 연무 현상은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초봄 태국 북부의 모습으로 한 차례 각인된 바 있습니다. 태국 치앙마이를 비롯한 북부 고원지대에서는 매년 2월부터 3월, 길게는 4월까지 옥수수 농가와 버섯 채취업자들의 산불 및 화전 개간으로 인해 극심한 미세먼지(PM2.5)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시기 치앙마이는 세계에서 공기질이 가장 나쁜 도시 1위에 오르기도 하며,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 특성상 매연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도시에 갇히게 됩니다. 한달살기의 성지로 불리던 치앙마이조차 이 시기만큼은 ‘화전 시즌’이라 불리며 현지 주민들조차 타지역으로 피신하고,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2~3월 치앙마이 여행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공식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습니다.
태국 북부의 화전이 농가 중심의 소규모 재배와 지형적 영향에 따른 것이라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와 칼리만탄의 연무는 글로벌 팜유 산업 및 대규모 토지 개발이 결합된 국제적 피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으로 촉발된 연기가 국경을 넘어 주변국 생태계와 관광업, 나아가 인근 주민들의 호흡기 건강을 위협한다는 본질은 완벽히 일치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의 화전 문제가 태국만큼 크게 대두되지 않았던 건 왜일까요? 매년 반복되는 문제이긴 했지만 주변국에서는 연무로 인한 피해가 짧게는 1주일에 한 달 내외로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포스팅을 보면 올해는 3개월 가까이 연무가 지속되면서 지금도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는 내용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보면 우기마저 늦게 온다는 올해가 최근 몇 년 새에는 가장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동남아 여행 수요, 기후 재난에도 좌우될까
최근 국내 주요 여행사들의 통계에 따르면 동남아시아 송출객 수요는 전년 대비 40% 이상 급감하는 등 가파른 하락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히치하이커는 이 문제를 이미 분석한 바 있는데요. 동남아 여행의 매력 감소에는 오랜 고물가 상황, 치안 불안 요소, 일본의 엔저 현상 및 중국의 무비자 정책 시행에 따른 타 지역으로의 수요 이탈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2026년 10월 현재 터져 나온 인도네시아발 연무 사태는 동남아 여행의 마지막 보루였던 휴양지로서의 쾌적함마저 앗아가며 여행심리를 냉각시키고 있습니다. 실제로 네이버 카페나 X(구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한국의 주요 소셜미디어나 여행 커뮤니티에는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전망이 잿빛 연기에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코타키나발루의 세계 3대 석양을 보러 왔는데 유독성 가스만 마시고 있다”, “아이 호흡기 문제 때문에 취소 수수료를 물더라도 베트남 중부나 일본, 대만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는 후기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만약 매년 9~10월의 인도네시아발 연무 문제가 지속된다면 이 시기의 싱가포르 및 말레이시아 관광산업은 장기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습니다. 앞서 치앙마이 사례에서 본 것처럼 특정 시즌의 여행은 피해야 한다는 일종의 공식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동남아 여행에서 ‘건기’는 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쾌적하고 여행하기 좋은 시즌으로 통용되었는데요. 연무 문제가 건기에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뜻밖에 성수기 시즌을 날리게 되는 거죠. 특히 한국에서는 9~10월에 연휴가 많고 관광수요가 높아지는데 이 시즌에 특정 국가로의 여행을 피해야 한다는 공식이 퍼지게 된다면 관광 수요의 큰 감소로 이어지게 될 겁니다.
마치며
과거에는 저렴한 물가와 휴양 인프라로 동남아 관광이 유지될 수 있었지만, 기후변화와 만성적 화전 문제가 결합한 오늘의 현실에서는 깨끗한 공기와 안전한 환경이야말로 여행지와 여행 시기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경제적 이익을 이유로 방치되어 온 화전과 이탄지 파괴는 이제 주변국들의 관광 산업과 생태계, 나아가 글로벌 관광객들의 외면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와 아세안 회원국들이 근본적인 화전 금지와 이탄지 복원에 대한 실질적인 국제 공조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잿빛 하늘’에 갇힌 동남아 관광 시장의 잔혹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근본적인 연대와 대책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