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패키지’ vs. 한국의 ‘패키지’
‘단체 여행’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은 현재 전 세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여행의 형태일까요? 이미 영미권에서는 토마스 쿡의 파산과 함께 한 시대를 마감한 여행의 형태가 된지 오래입니다. 현재 유럽 대륙 최대 규모 여행사인 투이(tui) 온라인에서 ‘패키지 여행’이라는 메뉴를 클릭해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패키지가 아니라 항공 + 호텔을 묶어 패키지라고 명명합니다. 즉 항공과 호텔 가격을 비교하기 귀찮은 이들을 위한 결합 판매 상품인 것입니다. 이외에 나머지 카테고리는 모두 개별 상품(크루즈/항공/호텔/기업 상용 등)으로 나뉩니다.
서로 모르는 이들이 짧게는 3일 ~ 십 수일동안 같은 단체 버스를 타고 같은 명소를 ‘구경’만 하는 여행을, 굳이 돈까지 주고 해야 할 이유가 이제는 없습니다.(2019년 한국관광공사 기준, 한국인의 패키지 상품 이용 비율은 20% 내외입니다) 실시간으로 교통과 숙박 예약을 모바일로 할 수 있는 세상에서, 단체 여행의 존재 가치를 대체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분명한 것은 현재 한국의 보편적인 패키지 여행상품의 구성과 수준은 그 가치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벤처 투자를 받은 ‘단체 여행’의 새로운 가치
그런데 최첨단 IT 업계에 투자 자본이 집중되는 미국 서부에서, 며칠 전 특이한 시드 자금 조달 소식이 있었습니다. IT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여행사’가 초기 투자 유치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 주인공은 2014년 워싱턴 DC에서 창립한 여행사, 엘 카미노 트래블(El Camino Travel)입니다. 이번 투자에는 벤처 캐피탈 회사 뿐 아니라 전 에어비앤비 부사장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이 여행사가 ‘여행사’로서의 존재 가치를 갖는 요인은 크게 3가지로 꼽아볼 수 있겠습니다.
- 여성 소비자의 새로워진 눈높이에 맞춘 경험
한국에서도 여성 전용 여행상품은 많았습니다. 한진관광이 2017년 론칭한 ‘뮤즈(Muse)’가 본격적이고, 여성 전용 여행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여성들의 개인적/사회적 욕구를 읽어내는 고품질 경험을 표방한 기업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여행을 만들기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여행업’만 알아서는 안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항공과 호텔과 명소만 결합해서는 양질의 ‘경험’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결국 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요.
엘 카미노의 창업자 카탈리나(Katalina Mayorga)는 대학에서 국제학과 인권을 전공했고 지구 환경정책으로 석사를 받았습니다. 또한 남미에서 북미로 이주한 이민 2세대이기도 합니다. 즉 소수자와 여성의 시선에서 여행 문화에 사회적 시각을 불어넣는 회사를 만든 것입니다. 엘 카미노의 여행은 여성을 ‘도약’하게 만드는 데 관심을 둡니다. 해당 지역의 창작자와 폭넓게 협업하고, 지속가능하며 책임의식이 있는 숙소를 선별하며, 여성의 도전을 지원하고 촉진하는 일정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단순히 ‘여성’이기만 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여행이 아니라는 것이죠.
- 누구와 함께 여행하느냐는 이제, 중요하다
앞서 한국의 패키지 여행이 ‘서로 모르는 이들이 같은 명소를 구경하는 여행’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핵심 포인트는 ‘서로 모르는 이들’입니다. 업계에서는 애써 무시하려 하지만 패키지의 만족도가 ‘일행이 잘 걸려야’ 평타 이상 친다는 건 이제 국룰(?)이 됐죠. 같은 여행상품을 산 한국인이라는 것 외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는, 일면식도 없는 타인과 인생의 소중한 추억을 함께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러다 진상이라도 걸리면?
전 세계의 부티크 럭셔리 여행사들은 단체 여행에서 함께 할 ‘그룹’을 선별하고 사전/사후 모임을 조직하는데 대단히 많은 공을 들입니다. 엘 카미노의 경우 한국에도 잘 알려진 ‘클럽하우스’를 이용해 일종의 사전 커뮤니티를 운영하는데요. 클럽하우스는 무료니까 아무나 챗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여행 커뮤니티 역시 유료 구독 플랜으로 가입을 해야만 합니다. 고도의 네트워크/커뮤니티 관리 역량은 여행산업에서도 필수입니다. - 여행자의 시간 관리를 해줘야 한다
한국의 높은 노동 시간과 부족한 여가 시간(이제 더욱 더 부족해질 전망이고요..)은 우리의 여행 문화를 빈곤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르는 사람 30명과 한 버스를 타고 10일에 10개국 도는 여행이 정말 최고라서 선택해 왔던 걸까요? 최고가 아닌 ‘최적’의 선택일 뿐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무엇이 최고인지도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최고를 경험해 본 적이 없거든요. 여행사들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여행 일정에 만족하며, 우리는 지금도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엘 카미노의 여행은 여성 혼자 쉽게 갈 수 없었던 모로코, 과테말라, 이집트와 같은 지역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여행 일정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지 않아요. 한 나라에 집중합니다. 또한 한 나라당 하나의 상품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여행자가 목적지만 선택하면, 최고의 경험을 보장해 주겠다는 겁니다. 앞서 커뮤니티를 통해 관심사별 소그룹을 선별한 후 여행 상품을 모객합니다.
또한 이들은 개발도상국의 여행사가 가진 취약한 기술력을 보완하는 기술 솔루션을 지원함으로써, 많은 현지 업무를 자동화하여 고객 경험을 개선하고 있습니다.(현지의 영세 여행사와 가이드가 쇼핑 수수료로 매출을 메꾸는 구조에 기대어, 고객의 소중한 시간을 쇼핑센터에서 낭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요) 이렇게 엘 카미노의 비즈니스 모델은, 기본적으로 고객이 돈을 내고 살 수 있는 최고의 선택에 집중합니다.
마치며
제가 관광공사 컨설팅으로 만나는 여행사들은 ‘패키지는 줄어들 뿐 없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반복적으로, 습관처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네. 저도 없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전망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그 패키지가 혹시 20년 전부터 똑같은 일정인 ‘7대 명소 + 3대 특식’ 패키지라면, 이미 많이 없어졌고요. 쇼핑센터 3회에 옵션 별도 상품을 유지하면서도 ‘없어지지 않을’ 20% 시장에 의존한다면, 그 회사는 아마 곧 없어질 겁니다.
‘2인 1실 기준으로 1인 정가를 책정하면서도 정작 2인이 같이 예약하면 x2 요금을 받는 패키지 요금 체계’를 계속 유지한다면, 글쎄요. 이거부터 혁신하는 회사가 그나마 남은 시장을 가져가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