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한 장과 신용카드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넘나들던 ‘글로벌 트래블러’의 시대가 저물고 있습니다. 국경과 비자가 없고, 마찰 없이 이동하는 글로벌 시티즌이라는 이상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최근 글로벌 온라인 여행 플랫폼 익스피디아 그룹(Expedia Group)의 아시아태평양 시장 관리 부사장 마이클 다이크스(Michael Dykes)가 웹인트래블에 제시한 거시 경제 분석은 팬데믹 이후 우리가 마주한 여행 시장의 거대한 지정학적·디지털적 파편화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히치하이커는 철저하게 ‘지정학적 안전지대’를 따라 재편되고 있는 글로벌 여행산업의 전환점을 짚어 봤습니다.
첫 번째 대전환: 글로벌 대륙 이동의 종말, ‘최소 저항 경로’의 부상
최근 몇 년간 세계는 인간과 자본, 상품의 이동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벽의 축적을 목격해 왔습니다. 우크라이나와 중동 등 글로벌 분쟁으로 인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하늘길은 끊임없이 교란되고 있으며,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한 대기 시간은 기약 없이 늘어났습니다. 태국 등 주요 관광국들은 비자 체류 기간을 단축하고 있고, 일부 국가들은 글로벌 결제 시스템에서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경고한 대로 인적·물적 이동의 장벽은 글로벌 성장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여행 소비자들이 선택한 생존 방식은 바로 ‘최소 저항 경로(Paths of Least Resistance)’입니다. 여행을 포기하는 대신 지정학적으로 편안하고, 비자가 열려 있으며, 결제가 익숙하고, 경제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안전한 복도’로만 움직이는 현상입니다.
실제로 2025년 한 해에만 510만 명의 러시아 여행객이 비자 장벽이 낮은 베트남, 태국,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갔으며, 중국의 전향적인 무비자 정책은 인바운드 관광을 전년 대비 50%나 급증시켰습니다. 무작위적인 이동이 아니라 경제적·지정학적 블록의 모양에 맞춰 여행이 동조화되면서, 바야흐로 거대한 ‘아시아-투-아시아(Asia-to-Asia)’ 붐이 아태지역을 휩쓸고 있습니다.
이러한 ‘최소 저항 경로’를 따르는 흐름은 한국 여행 소비자들의 행보에서 가장 정교하고 폭발적인 형태로 관측됩니다. 장거리 노선의 공급 불안정과 치솟는 고유가, 까다로워진 유럽·미국행 심사 장벽을 마주한 한국인들의 가장 극적인 변화는 중국 시장에서 나타났습니다.
한국관광데이터랩과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중국이 한국인 대상 무비자 입국 정책을 시행하고 이를 연장함에 따라 2026년 1월 방중 한국 관광객은 약 30만 3,000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48.1%나 급증했습니다. 2026년 연간 야놀자리서치 전망에서도 상위 4대 목적지 중 중국이 24.2%라는 독보적인 성장률을 기록하며 그간의 부진을 씻고 시장을 장악 중입니다. 복잡한 비자 발급 절차라는 ‘가장 큰 저항’이 사라지자마자, 소셜 미디어에는 ‘금요일 퇴근 후 상하이/칭다오 주말 여행’이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상하이의 경우 항공권 검색량이 전년 대비 160% 이상 폭증하며 “5분마다 한국인을 마주친다”는 현지 보도가 나올 만큼 마찰 없는(Frictionless) 단거리 레저 수요를 고스란히 흡수했습니다.
반면, 한때 동남아 여행의 절대 강자였던 태국의 경우 외생적 충격과 구조적 피로감이 겹치며 역성장(-3.4%)을 기록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한국 여행자들은 이제 익숙한 결제 인프라(트래블로그, 트래블월렛 등)와 압도적인 엔저를 무기로 삼은 일본, 그리고 정부 차원에서 국경의 문턱을 완전히 낮춰버린 무비자 중국 등 ‘심리적·제도적 저항이 제로에 수렴하는’ 초근접 안전지대로 여행 지도를 격렬하게 좁혀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대전환: “디지털 지갑이 우리를 가른다”…분절된 디지털 운영체제
지정학적 블록화만큼 치명적인 것은 디지털 세계의 파편화입니다. 과거에는 전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디지털 생태계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날의 디지털 세상은 과거 물리적 화폐가 난립하던 구세계처럼 작동합니다. 결제 방식도, 보안 표준도, 신뢰에 대한 가정도 국가와 블록마다 완전히 다릅니다.
현재 인류의 40%는 일상생활의 디지털 운영체제(OS)가 철저히 로컬과 국가 주권에 종속된 마켓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대신 틱톡을, 와츠앱 대신 위챗을, 비자(Visa) 카드 대신 알리페이를 쓰는 세상입니다. 디지털 인프라가 인간의 이동 패턴과 행동 양식을 완전히 규정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마이클 다이크스 부사장의 말대로 “결제는 가장 현실적인 장벽이며, 우리의 디지털 지갑은 우리를 연결하는 동시에 분절“시키고 있습니다.
이 분절된 세계에서 살아남을 미래의 여행 기업은 미국식 스택과 중국·로컬식 스택을 모두 유연하게 넘나드는 일종의 ‘디지털 스위스(Digital Switzerlands)’가 되어야 합니다. 거대 경제 블록 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고객이 어디에 있든 그들의 로컬 OS에 맞춰 마찰 없는 결제와 예약 경험을 제공하는 인프라를 구축해야만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행 OS의 재편’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여행 시장은 가장 치명적인 모순에 직면해 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를 자랑하지만, 정작 방한 외래객이 마주하는 국내 플랫폼 생태계는 철저히 내국인 중심으로 설계된 ‘디지털 갈라파고스’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에서 겪는 불편의 약 30%는 지도, 결제, 이동 등 디지털 영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보안 규제로 도보 길 찾기가 불가능한 구글 지도는 외국인이 가장 불만족한 앱 1위로 꼽히며, 국내 독점 모빌리티 앱은 국내 휴대전화 번호 인증과 국내 신용카드 등록이라는 ‘통곡의 벽’을 요구해 외국인의 발을 묶습니다. 미래의 여행 경쟁력은 화려한 관광 자원이 아닌, 외국인이 자국에서 쓰던 디지털 지갑과 OS의 연속성을 현지에서 마찰 없이 이어주는 ‘플랫폼 수용력’에 달렸습니다. 우버, 그랩, 알리페이 등 글로벌 스택과의 심리스(Seamless)한 API 호환성 확보가 시급한 이유입니다.
세 번째 대전환: 실버 세대와 알파 세대, 극단적인 인구통계학적 양극화
시장의 장벽이 높아지는 와중에 내부의 인구통계학적 구조 역시 극단적으로 쪼개지고 있습니다. 현재 아시아태평양(APAC) 지역의 여행 수요는 7억 1,500만 명에 달하는 ‘알파 세대(Gen Alpha)’와, 그 반대편에 위치한 부유하고 장기 여행을 즐기는 7억 2,200만 명의 ‘실버 세대(Silver Generation)’로 양분되었습니다.
이 두 거대 집단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단일한 여행 상품이나 프로필은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동반한 젊은 가구의 기술 중심적 성향과, 은퇴 후 여유로운 자산과 시간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고령층의 프리미엄 성향은 비즈니스의 설계 단계부터 완전히 다른 접근을 요구합니다.
인구통계학적 양극화 속에서 여행사들은 탄탄한 자산과 시간적 여유를 기반으로 높은 마진을 안겨주는 ‘실버 세대(액티브 시니어)’ 겨냥 프리미엄 패키지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권력은 밀레니얼 부모의 전폭적인 투자 속에 자라난 ‘알파 세대’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AI와 가상 세계를 호흡한 알파 세대는 AI 컨시어지를 통한 초개인화된 탐색,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피지털(Phygital) 여행’, 그리고 현지에서 가치와 기술을 배우는 ‘스킬케이션(Skillcation)’ 중심의 소비를 펼칠 것입니다.
결국 여행 기업들은 현재의 캐시카우인 실버 세대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미래 알파 세대의 눈높이에 맞춘 ‘마찰 제로(Frictionless)의 디지털 인프라’를 동시에 구축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마치며
결국 장벽의 시대에 마주한 트래블 마켓은 기업들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경제 블록의 디지털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두 갈래로 찢어진 인구통계학적 절벽에서 어느 쪽 세대를 위한 비즈니스를 구축할 것인가?”
이 명확한 타깃팅과 ‘마찰 제로(Frictionless)’의 인프라를 확보하는 기업만이 쪼개진 세계의 새로운 여행 지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히치하이커는 이 거대한 지정학적 재편 속에서 한국 여행 시장이 마주할 새로운 ‘최소 저항 경로’를 계속해서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https://www.webintravel.com/travel-is-reorganising-along-paths-of-least-resistance






